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온 5세 (문단 편집) === [[성상 파괴 운동]] === 한편, 813년에 크룸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할 때에 성당들에서는 구국 기도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때 나이가 지긋한 퇴역병들이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부활하여 제국을 구해줄 것을 기도하며 성당 앞의 무덤으로 모여들었다. (원래 군대는 [[성상(조형물)|성상]] 파괴파가 다수였다) 이를 자켜본 (군인 출신의) 레오 5세 역시 본래 성상 파괴론자였고, 숨기고 있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로 하였다. 평화가 찾아온 814년의 6월부터 레온 5세는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머지않아 성경에 성상을 공경하라는 얘기가 없다면서 성상 파괴 노선을 확립하였다. 이후 레온 5세가 즉위 직전에 무릎 꿇었던 황궁의 칼케 문 위에 있던 성상[* 레온 3세에 의해 철거되고 이리니에 의해 재건된]을 철거하였다.[* 그 과정이 치밀하고도 웃긴데, 726년처럼 병사들의 일방적인 철거가 아닌 명분을 만들었다. 우선 병사들을 보내 성상 앞에서 저주와 투석을 시킨 후, 황제가 (우연히) 그 앞에 나타나 성상을 '보호'하고 신성모독을 금한다는 이유로 성상을 철거하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815년에 황궁에서 열린 시노드에서는 성상 옹호파와 성상파괴파 모두 참석하였으나 결국은 황제의 뜻이 관철되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28년에 성상파괴파가 재림한 것이다. 황제는 그해 4월에 성상 옹호파인 세계 총대주교 니키포로스를 현재 프린스 아일랜드 ([[마르마라 해]]에 위치)로 유배보내었고[* 828년에 그곳에서 죽는다.] 강경 단성론파인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탄압도 실시하여 그들의 세력을 아르메니아로 축소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상 옹호론을 억압한 것도 아니어서 제국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황제를 비난한 옹호론자 몇 명은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